‘비거니즘 전시 매뉴얼’은 전시를 하면서 당면하는 여러 결정의 순간에 환경에 덜 빚지고, 종차별적 착취와 탄소
발생량을 줄이는 방법을 택할 수 있도록, 즉 태도로서 비거니즘적인 실천을 지향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한다.
하나의 전시가 만들어지고 종료되기까지 전시를 둘러싼 협업자들은 매 순간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전시 주제,
작가와 작품 외에도 드러나게는 공간의 연출, 동선, 조명, 홍보물의 종류와 배포 방식, 보이지 않게는 작품 운송
방법과 포장재의 종류, 운영시간과 매뉴얼, 기록의 방식, 철거와 폐기의 방법 등 크고 작은 결정들이 모여 전시를
이룬다. 코로나 19 상황 이후로는 여기에 동시간대 관객수, 관람 예약 여부와 예약 시간의 간격 등 전에 없던
요소들도 추가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을 내릴 때 우선 고려하는 판단 기준은 작품, 전시 주제와의 연결성, 미감, 전시
예산과 안전 등일 것이다.
우리는 이 고려 항목에 ‘환경에 대한 부담’을 추가하고자 한다. 생태와 환경이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와 관련된 전시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일회용품의 사용을 무엇보다 재고해야 하는 이때 전시는
태생적으로 일시적, 일회적인 특성을 갖는다. 과연 전시라는 매체가 환경적인 주제를 담는 적절한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인류의 환경파괴에 관한 고찰이 담긴 작품을 일회용 가벽 안에 두거나 일회용 포장재로 둘둘 싸맬 때,
우리는 공공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 공공의 환경을 괴롭히는 역설에 놓이고 만다.
‘환경을 생각하면 전시를 열지 않는 편이 최선’이라거나 ‘일회성은 전시의 속성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 앞서,
우리는 전시를 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마주하는 재료나 방법의 선택에 고려의 기준을 추가하기를 제안한다. 물론
전시를 이루는 결정에서 환경이나 탄소 배출량이 작품이나 안전보다 매번 앞서는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길러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 위에 오르는지 알아야 하듯이, 내가 사용하는
재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버려지고 다시 활용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술이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과정 전체를 생각하면 전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서
선택하게 되는 재료나 재현방식 등 비거니즘 시각으로 점검해야 할 부분은 더 많겠지만 이 매뉴얼에서는 작품 창작
이후의 문제에 집중했다.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순서대로 생각해보며, 각 과정에 흔히 사용되는 재료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내재 에너지, 대안 재료의 장단점 등을 나열했다. 또한 다소 관습적으로 이루어졌던 전시의
운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했다.
지구 전체 역사에 비하자면 찰나에의 지나지 않는 인류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난을 가져왔다. 우리는
환경과 생태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 ‘인간중심적 태도’를 벗어나 더 적극적인 ‘지속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자
‘비거니즘'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은 작가, 기획자, 디자이너, 건축가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작성 중인’ 목록이다. 아직 부족하지만 ‘환경에 대한 부담’을 고려사항에 넣은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이 전시를 위한 결정과 선택을 앞둔 누군가에게 안내가 되기를 바라고, 같은 분야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미 많은 결정과 선택을 해본 누군가의 도움으로 더 확장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이러한 환경적 기준이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본(default)’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